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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리는 한국의 자손입니다”
김태진 사무국장  |  hansangne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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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8.31  13:2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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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진 한국문화국제교류운동본부 사무국장(전 맨해튼한국학교장)

  나는 보라색을 참 좋아한다. 장기간 보라색을 좋아하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빛깔이 뿜어내는 매력적인 분위기에 오랜 간 꽉 잡혀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청도 운문사 입구에 ‘보라색’ 도라지꽃이 깔려있다는 글을 읽고 그곳으로 달려갔고, 보라색 넥타이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선을 본 남자에게 호감을 가졌는가 하면, 대학 시절, 미술동아리에서 가을 풍경을 온통 보라 빛깔로 그려낼 정도로 나의 보라색 사랑은 집요하기까지 하다. 때로는 왕좌에서 뿜어내는 위엄이 느껴지고, 때로는 낙엽이 떨구고 간 허무와 절망 같기도 하고, 마술이 펼쳐질 때마다 번쩍번쩍 비치는 기묘함 같은가 하면, 고급 와인의 깊은 맛 뒤에 배어 나오는 중후한 여운 같기도 하다. 이렇듯 보라색은 딱히 어떤 느낌을 준다고 단정 짓기 어려운 참 오묘한 색깔이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사실은 그 신비하기 그지없는 빛깔의 원형이 빨강과 파랑이라는 거다. 원색의 강하고 분명한 특성 두 개가 만나 다양한 얼굴을 가진 묘한 빛깔을 만들어 내다니... 어떤 면에선 그 불분명한 묘함이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하는 천덕꾸러기가 될 수도 있고, 어떤 면에선 독특함이라는 권좌에 올려지기도 하는 것 같다. 이미 음악과 음식 등 여러 방면에서 서로 다른 특성이 만나 크로스오버(Crossover), 퓨전(Fusion)이라 불리며 각광을 받고 있고, ‘대니얼 헤니’가 어렸을 적에는 혼혈이라 놀림을 받았지만 세월이 변하니 그 개성이 빛을 발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정말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렇다. 세상은 더욱 복잡해지고, 세계화라는 시대 조류에 따라 빨강, 파랑의 영역을 넘어선 ‘보라’의 영역, 그것에 대한 이해와 연구, 그리고 그 ‘조화’에 대한 가능성은 아주 큰 시장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넓고 다양한 세상에 대한 이해의 눈이야 말로 앞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또 하나의 혜안이 아닐까 싶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전체 학부모와 학생에게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말을 쓰면서 멈칫멈칫하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 아이들 모두가 한국계 부모를 둔 단순한 ‘코리안 아메리칸’ 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국제결혼을 한 부부가 증가하면서 학기를 거듭할수록 혼혈 학생의 숫자가 증가하여 2000년대 초만 해도 5 %에 불과하던 숫자가 5, 6년 사이 25%까지 증가하며 한국계 외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를 둔 아이들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배려를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제 단순히 ‘우리의 모국, 한국’ 만을 강조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사고로 여겨질 만큼 세상은 열린 변화를 겪으며, 그 물결은 ‘한국학교’까지 몰려온 것이다. 게다가 한인의 미국 이민 역사도 100년을 넘으면서 후손이 3, 4세에 이르다 보니 그 혈연이 단순할 수만은 없게 되고, 혼혈에 혼혈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애매모호하고 복잡한 정체성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인데다 그 역사가 200년을 넘다 보니 이런 복잡한 정체성에 대해 ‘혼성적 정체성(Hybrid-Identity)’이라 칭하며 꽤 활발한 연구가 있지만, 혈연적 가족주의가 강한 한국인은 문화에 있어서의 ‘퓨전(Fusion)’은 개방적인 반면 혈연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경직성이 강하기에 연구 시장이 폭넓진 않은 것 같다. 어쨌든 이 ‘Hybrid- Identity'에 대해 연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Burton 가족과의 만남은 ‘정체성 교육’에 대한 새로운 과제를 던져 주었다.

   06 가을학기, 독특한 혈육을 가진 알버트와 올리비아 남매가 입학했다. 최초의 흑인계 학생이다. 미국계나 아랍계에 비해 더욱 눈에 띄고, 처음 있는 일이다 보니 다들 낯선 호기심으로 바라본다. 구레나룻을 기른 알버트 아버님은 부리부리한 눈매에, 윤기 나는 검은 피부가 건장한 체구와 맞물려 큰 조각상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어머니 또한 한국인이라고 하기에는 48% 부족한, 백인 인상이 섞여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아메리칸 인디언의 모습도 언뜻 보이는 듯 하고... 알버트는 10살, 올리비아는 8살, 나이로 치면 4, 5단계 반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한국어는 들어본 적도 없는 초보이기에 5살 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기초 2단계에 들어가야 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담임에겐 송구하기 그지없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만 가르치는 것도 힘이 드는데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학생이 함께 있으면 얼마나 힘든 가를 경험한 나로선 더욱 미안하다. 그렇지만 어쩌랴. 특수한 경우의 학생 소수를 위해 새로운 반을 만들 여건이 못 되다 보니 모든 부담과 역할은 선생님들 몫이다. 한국학교에만 있는, 한국학교 교사의 애환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나이 차가 5-6살 씩 차이 나는 아이들과 한 반에서 사투(?)를 벌이는 것 또한 ‘보라’의 영역에 해당되지 않을까?).

  어쨌든 이런 복잡미묘하고 힘든 상황을 불평하나 없이 흔쾌히 받아들이고, 높은 순발력을 발휘하는 선생님들의 능력과 희생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알버트 남매를 맡은 곽 선생님은 약대를 다니다 교사가 되고 싶어 다시 공부를 할 정도로 교육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분이기에 더욱 안심하며 아이들을 맡겨 본다. 젊고 예쁜 선생님이 두 팔 벌려 반기니 생소한 사람들 틈에서 어색해 하던 알버트와 올리비아의 모습이 환하게 피어오르고, 내 마음도 가볍게 날아오른다. 이렇게 새 학기, 첫 날의 문은 또 다른 세계의 아이들을 맞으며 더욱 활짝 열렸다.

   “우리는 ‘한국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외할아버지의 성함은 박영준(가명)이고, 그 분은 한국의 참전용사였습니다.” 
   첫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내려온 곽 선생님이 가슴 안에 넣어 놓기가 벅찬 표정을 지으며 한 말이다. 
   “제가 왜 한국학교에 왔냐고 물으니까 알버트가 이렇게 대답하는 거예요. 큰 소리로 어찌나 씩씩하게 말을 하는지 그 감격과 흥분이 가시질 않아요..."
   순간 내 마음은 ‘찌르르’한 울림에 감전되고 만다. 6·25 때 참전한 한 한국인이 미국으로 건너와서 외국인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성장해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고, 그 아이들이 조상을 알기 위해 모두들 쉬는 주말에 한국학교에 오고... 그 아이 입에서 나온, ‘우리는 한국의 자손입니다’...
   
   알버트 어머님은 한국인 아버지와 러시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녀는 흑인계 남편을 만나 알버트와 올리비아를 낳은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버지의 초콜릿 색 피부와 어머니의 하얀 피부의 중간인 구릿빛 피부를 갖게 되었고, 이목구비는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더 물려받아 두툼한 입술에, 크지만 그리 높지 않은 코를 갖고 있다. 170cm를 넘는 큰 키의 어머님은 한국계의 은은함과 러시아계의 분명함이 조화된 온화한 매력을 풍기는 미인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그 정체성을 어떻게 확립해야 하나? 내 생각엔 부계를 따르고, 외모도 흑인에 속하니 ‘아프리칸 아메리칸(African –American)’으로 하는 것이 맞을 듯싶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 규정지을 수 없는 또 다른 혈연이 분명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어머니는 아이들의 부계뿐만 아니라 모계 쪽 조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들의 계보를 확실히, 상세하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엄마의 조상은 한국인이라고... 그런 엄마에게서 태어난 너희들이니까 비록 반쪽의 반이지만 너희 안에는 한국인의 피도 흐르고 있다고...’ 그래서 알버트 남매는 그의 ‘조상’이 한국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했고, 외할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에 대해 배우러 온 것이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라 그런지 조상에 대한 교육이 투철함을 느낀다. 미국인들이 독일, 아일랜드, 폴란드계 등 본인의 선조가 유럽의 어느 계열인지를 상세히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알버트 어머니도 조상의 계보에 대해 확실한 교육을 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가슴 안에 한 조각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간직해 온 ‘한국’을 자녀들에게 피워주고자 한국학교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한국 사람을 만나고 드디어 그 커뮤니티에 입성한 감격 때문인지, 마음 안에만 있던 한국이 오랜 간의 외사랑에 지친 듯 마구 쏟아져 나온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한국말은 못 가르치셨지만 한국계라는 것은 항상 일러주시고, 한국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그러면서 저에겐 한국에 대한 동경, 그리움이 생겼지요. 그러나 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그 어떤 환경도 제겐 주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우리 아이들이 크면 제가 배우지 못한 한국어를 꼭 배우게 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아는 한국 사람도 없고, 아이들 나이는 자꾸 먹어 가는데... 여기저기 알아보다 맨해튼에 한국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기뻤는지... 뉴저지에 살고 계신 아버지도 제가 아이들을 한국학교에 보낸다고 하니 참 좋아하셨어요... 오래 전부터 올리비아, 알버트 모두 태권도를 배우고 있어요. 아버지는 항상 한국의 태권도를 자랑하셨거든요. 현재 알버트는 검은 띠예요...” 

   흥분된 어조로 아버지와 한국에 관계된 이야기를 쉼 없이 쏟아내는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을 낸다. 마치 오랜 간 고립되어 있다 자신의 세상에 돌아온 기쁨을 토로하는 듯했고, 그 이야기를 통해 복잡한 자신의 정체성 또한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알버트 남매의 등장은 ‘뿌리 교육, 조국에 대한 자긍심’과 관련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했다. 외가로 거슬러 올라가야 간신히 만날 수 있는 한국인 조상임에도 불구하고 알버트 가족이 보여준 한국에 대한 사랑은 외국에서 살고 있는 ‘100% 한국인’인 우리에게 좋은 자극제가 된 것이다. 우리의 뿌리에 대한 인식과 자긍심은 어떠하며, 또 아이들에게 우리의 조상과, 뿌리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심어주었나?

   한 학기를 마치는 종업식 및 학습 발표회 날이다. 태권도 발표 순서이다. 4, 5살 어린 꼬마들이 발차기 하는 모습이 귀여우면서 대견스럽다. 그 기특함에 한껏 미소를 머금고 어린 재롱에 빠져 든다... 이어 한 소년이 ‘위풍당당’ 등장하자 미소에 긴장과 호기심이 더해지는 듯하다. 태극 마크가 분명한 흰 도복에, ‘검은 띠’를 한 ‘알버트’다. “태~권!”... 절도 있게 허공을 가르고 찌르는 모습이 날카롭게 빛나고, 몸을 날려 격파하는 모습은 관중의 탄성을 자아낸다. 연이어 울려 퍼지는 함성 같은 박수... 그 소리는 외할아버지의 나라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반의 반쪽의 한국인 3세’에 대한 격려임과 동시에 우리의 ‘뿌리 교육’에 관한 자성과 고무의 목소리가 되어 강당 안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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