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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번역하다
조현용 교수  |  iiejh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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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8.31  09:3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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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용(경희대 교수, 국제교육원 원장)

  8월 29일은 국치일(國恥日)이다. 광복 이후 70년 간 일본어의 잔재를 없애려는 노력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해방 이후 우리는 뿌리 깊이 식민지 생활에 젖어 있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벤또’를 싸서 학교에 갔고, ‘쓰메끼리’로 손톱을 깎고, ‘바께스’에 물을 받아 걸레를 빨았다. ‘와리바시, 다마’ 등 일본어의 흔적은 무수히 많았다. 한동안은 별 문제의식 없이 사용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일본어의 잔재를 없애자는 국민운동이 생기고 금방 우리의 생활 속에서 사라졌다. 놀라운 일이었다. 언어가 저렇게 쉽게 변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위에 쓴 일본어 어휘들은 이제 모두 컴퓨터에서 빨간 줄이 그어진다. 우리말에 없는 표현이란 의미다.

  그나마 이런 어휘는 일본어라는 생각은 있었다. 그런데 어떤 어휘나 표현은 일본어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사용하고 있다. ‘-에 있어서’나 ‘-의’, ‘-으로서의’, ‘-으로부터의’ 등의 남용은 일본어의 잔재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이오덕, 우리글 바로쓰기) 어쩌면 이게 더 큰 문제다. ‘벤또 류’의 어휘가 금방 사라진 반면 이런 일본어식 표현은 여전히 남아있고 쉬이 사라지기 어려우리라 본다. 그 이유는 이런 표현은 생활 속에서 쓰였다기보다는 번역을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번역이 무서운 것은 생각뿐 아니라 수많은 언어표현도 함께 들어오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쓰는 이 글에도 번역투 표현이 여기저기에 담겨 있을 수 있다. 가끔은 이런 현실이 두렵다.

  번역에서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어휘의 번역이다. 서양의 책을 번역하면서 해당 어휘를 우리말에서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번역이 ‘또 하나의 예술’로 표현되는 것은 어휘와 표현 찾기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잘 된 번역을 보면, ‘예술이다!’라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서양의 문명이 물밀듯이 들어오던 개화기 시절에 우리는 어휘를 어떻게 번역했을까? 새로운 발명품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올 때 우리는 어떻게 이름을 붙였을까? 아쉽지만 우리는 많은 어휘를 직접 번역하지 못했다. 대부분 일본에서 번역된 어휘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일본에서 메이지시기에 집중적으로 번역된 수많은 개념 어휘를 우리도 사용하게 된 듯하다. 대표적인 어휘가 ‘사회, 자유, 권리, 자연, 철학, 개인, 사진’ 등이다.(최경옥, 번역과 일본의 근대) 많은 어휘가 일본에서 새로 만들어지거나 중국이나 한국에서 사용되는 어휘의 개념을 바꾸어 사용했다. 이 밖에도 수많은 학문적 어휘가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다. 내가 국어학을 공부하면서 배웠던 수많은 용어는 우리가 번역한 게 아니다. 일본 학자의 번역을 우리가 큰 고민 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일본 학자의 번역일 거라고 별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스스로 고민하며 어휘를 번역하는 것과 번역된 어휘를 가져다 쓰는 것은 천지차이다. 생활 속의 일본어 잔재는 국민운동으로 없앨 수 있었으나 번역을 하며 들여온 일본어식 표현은 알면서도 없애기 힘들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번역을 하며 만들어낸 신조어들은 전혀 의식조차 못하고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서구의 문명을 번역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본의 번역을 번역한 것이다. 지금도 수많은 학문 용어는 일본의 번역을 그대로 쓰고 있다. 아무 고민 없이.

  광복 70년을 맞이하여 우리 학문 수준을 깊은 반성과 함께 돌아본다. 학문에서는 용어가 중요하다. 개념이 중요하다. 이제 어떤 어휘가 일본에서 번역한 어휘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널리 우리 학문 속에 들어와 있다.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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