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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조선의 국기(國技)를 아십니까?전통무예 십팔기(十八技)의 역사와 가치
신성대 동문선 대표  |  hansangne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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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8.28  16:3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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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대 동문선대표

대저 나라가 있으면 군사가 있기 마련이고, 당연히 각종 무기와 그것을 다루는 기예가 없었을 리 만무하다. 한데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단 한 줄도 없다. 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은 옛 조상들이 외적이 쳐들어오면 관군들은 다 도망가고, 민중들이 맨 주먹과 곡괭이, 낫, 쇠스랑을 들고 일어나 외적을 물리친 줄 알고 있다.

  덕분에 많은 한국인들은 한국의 전래 무술이라면 ‘태권도’, ‘택견’만 떠올린다. 아무렴 산에 가 토끼를 잡으려 해도 돌멩이나 작대기를 들고 쫓기 마련인데, 설마 맨주먹으로 외적을 쳐부수었을까? 이처럼 무예에 대한 개념이 없다보니 우리 역사서에 단 한 번도 무예라고 언급된 적이 없는 민속놀이 ‘택견’을 무예종목 국가중요무형문화제로 지정하는 진짜 ‘어리석은’ 일까지 자행되는 것이겠다.

  고려 이전에는 각 지방의 호족과 유력한 군벌들이 각자의 사병을 거느리며 이들에 대한 독자적인 지휘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무사들이 익히는 무예가 통일되지 않은 채 제각각으로 전수되어왔다. 그 후 조선이 창건되어 이러한 사병(私兵)이 혁파되고 훈련원(訓練院)이 설립됨으로써 무사의 훈련과 선발은 온전히 국가의 관리 하에 들어갔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당시에 쓰이던 각종 무기가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 각 무기를 사용하는 자세한 기술에 관한 것은 정리되지 못했다. 또한 모든 양인(良人)은 생업에 종사하는 동시에 국방의 의무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갑옷과 무기를 갖추고 수시로 무예 훈련에 참가해야 했다. 이렇듯 조선전기에는 유교적 정치질서의 확립과 동시에 상무(尙武)의 기상이 드높았지만 약 2백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국제적인 평화의 시기를 거치면서 외적에 대한 방비는 소홀해지고 신성한 군역의 의무도 점차 민중 수탈의 도구로 변질되어 갔다.

  임진왜란과 《무예제보(武藝諸譜)》

  그러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임금이 압록강까지 피난 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조선은 다시금 무비(武備)에 힘쓰게 된다. 당시 명(明)의 원병이 사용했던 척계광의 병법을 받아들이기 위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입수하고, 명나라 장수들에게 그 기예를 배워 이를 조선군에게 훈련시켰다. 하여 명조(明朝) 연합군이 왜구를 물리쳤다. 그리고 조선후기 최대의 군영으로 발전하는 훈련도감(訓練都監)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왜구를 물리친 후, 선조는 척계광의 육기(六技)인 ‘곤봉(棍棒)’ ‘등패(藤牌)’ ‘낭선(狼列)’ ‘장창(長槍)’ ‘당파(鎲鈀)’ ‘쌍수도(雙手刀)’를 정리하여 《무예제보》를 편찬하였다.

  광해군과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

  명(明)이 기울어지며 새로이 부상한 후금(後金)은 조선에게 새로운 위협의 대상이었다. 왜구와는 전혀 달리 주로 기마전술(騎馬戰術)을 사용하는 후금에 대비하기 위해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   '협도곤(夾刀棍)'   '구창(鉤槍)' 등의 무예가 도입되었다. 광해군(光海君)은 위의 기예들과 《무예제보》의 편찬과정에서 빠진  '권법(拳法)'   '왜검(倭劍)' 을 추가하여 《무예제보번역속집》을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이 인조반정을 통해 강제로 퇴위된 후로 이 책은 조선의 공식 무예서로 전해지지 못하였다.

  병자호란과 사도세자의 《무예신보(武藝新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한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조선에 본격적인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에 유연하게 대처하던 광해군과는 달리 인조(仁祖)는 명분론을 앞세워 청나라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결국 1636년 병자호란을 맞아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였다.

  이러한 치욕을 씻기 위해 효종은 북벌(北伐)을 강조하여 다시금 무비(武備)에 힘을 쏟았다. 비록 북벌은 실행되지 못하였으나 계속되는 청나라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조선은 다양한 무기의 개발과 무예의 확립에 지속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를 위해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던 우리의 무예뿐 아니라 중국, 일본의 무예까지 우수한 것을 모두 검토하였다.

  그러한 노력으로 숙종(肅宗) 대에 이르기까지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예도(銳刀)’ ‘본국검(本國劍)’ ‘왜검(倭劍)’ ‘교전(交戰)’ ‘월도(月刀)’ ‘협도(俠刀)’ ‘쌍검(雙劍)’ ‘제독검(提督劍)’ ‘권법(拳法)’ ‘편곤(鞭棍)’ 등의 12가지의 다양한 기예가 개발되고 체계화되어 추가되어 갔다. 또한 청나라의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이들 기예를 말을 타고 사용하는 법도 정리되었다.

  영조(英祖) 대에 왕세자로서 대리청정을 한 사도세자(思悼世子)는 이러한 무예들이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의 군영에서 서로 다르게 훈련하던 것을 통일하고자 《무예제보》의 6기에 앞서 말한 12기와 기창(騎槍), 마상월도, 마상쌍검, 마상편곤을 묶어 《무예신보》를 편찬하였다. 이로부터 '십팔기(十八技)'라는 명칭이 탄생하였다. 십팔기의 확립에는 조선 무예의 표준, 즉 국기(國技)를 세운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당시 각 정파별로 장악하고 있던 5군영의 기예를 통일시키고 일원적인 병권을 장악하려고 한 사도세자의 의지가 담겨있었던 것이다.


  정조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사도세자가 노론의 견제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자 그의 아들인 정조(正祖)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비운에 죽어간 아버지 사도세자를 복권(復權) 시키고 그 뜻을 이어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사도세자가 《무예신보》를 편찬한 업적을 이어 여기에 '격구(擊毬)'와 '마상재(馬上才)'를 추가하고 십팔기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집대성하여 일종의 백과사전을 편찬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무예도보통지》인 것이다. 정조는 직접 지은 이 책의 서문에서 조선 국기의 명칭을 ‘삽팔기’로 명명하였다.

  정조 당시 최대의 군영이었던 장용영(壯勇營)에 '십팔기군(十八技軍)'이라는 제도를 두어 군사들의 무예수련을 직접 독려했을 만큼 십팔기 확립에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던 정조에 의해 십팔기는 국기(國技)로서 그 위치가 확고해졌던 것이다.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조선군은 삼수병(三手兵)제를 운용하였다. 사수(射手), 포수(砲手), 살수(殺手)가 함께 연합하여 전투를 치렀는데, 그 중 살수가 곧 십팔기군이다.

  고대 병장무예의 정화 ‘십팔기’

  현재 동양3국은 물론 지구상에 유일하게 온전한 형태로 그 기록과 실기가 전해지는 군사무예, 즉 마샬아트는 이 ‘십팔기’가 유일하다. 그렇다면 그 많은 중국과 일본의 무술은? 그건 사실 마샬아트가 아니다. 모두 민간에서 전해져 오던 호신술들이다. 다시, 그렇다면 임진왜란 때 조선에 전해진 명나라 척계광의 6기는? 450여 년 전 명(明)의 멸망과 함께 그 실기는 멸실되고 기록만 남아있다.

  왜 전 세계의 그 많은 군사무예(마샬아트)들이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을까? 모든 군사무예는 그 왕조와 운명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즉, 그 왕조가 망하면 같이 없어지는 것이다. 하여 십팔기도 조선의 명망과 함께 이 땅에서 사라지고 대신 일제 식민무예가 군(軍), 관(官), 경(警), 학교에 체육[武道]과목으로 강제 이식되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검도(劍道), 유도(柔道)이다.

  그 외에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시중에 호신술로 들어왔던 가라테(空手道)는 한국전쟁 후 최홍희 장군의 주도로 한국식으로 개명을 하게 되는데, 61년에 ‘태수도(跆手道)’로, 다시 65년 8월에 ‘태권도(跆拳道)’로 확정되었다. 그러니까 성까지 바꿔 귀화를 한 셈이다. 물론 그 이전에 우리 역사에서 ‘태권’이란 단어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 외에 합기도(合氣道) 등 거의 모든 일본 무술이 한국에 다 들어왔다.

  식민무예로 극일(克日)?

  해방 후 지금까지 한국인들은 줄기차게 일제잔재를 청산한다며 기를 쓰고 있다. 하여 지금은 웬만한 분야에서는 친일의 흔적이 다 밝혀지고 지워져나가고 있다. 한데 유독 이 무술(호신술)계에서만은 감히 그 전래 과정을 언급도 못한 채 70년 동안 자기기만 해왔다. 역사를 제대로 밝히기는커녕 지금도 한국의 전통문화인 것처럼 족보를 속이거나 감추기에 여념이 없다. 문화의 속성상 주고받는 과정이 원래 그러할진대 굳이 속일 필요가 없건만, 아무렴 ‘일제식민문화’라는 쪽팔림 때문에 다들 ‘좋은 게 좋다!’며 모른 척 속아준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영 사라질 뻔했던 십팔기가 천우신조로 그 명맥을 이어와 근자에는 완전한 모습으로 되살아나 보급되고 있다. 유일한 전승자이신 해범(海帆) 김광석(金光錫) 선생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조금씩 그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전 세계인들이 이 살아있는 진짜 마샬아트를 보고 열광하게 될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이미 중국에서도 자신들이 잃어버렸던 명나라 국기가 한국의 십팔기에 원형 그대로 전한다는 사실을 알고 지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니 장차 한중 문화교류의 대표 아이콘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겠다.

  제 나라 국기도 모르면서 문화융성?

  참고로 많은 한국인들이 ‘십팔기’를 중국무술로 오해하고 있으나, 기실 중국 역사에는 ‘십팔기’란 단어가 없다. 5천년 역사상 우리가 주체가 되어 한중일의 동양문화를 종합하여 체계화시킨 것으로는 무예 십팔기가 유일하다. 그리고 그것을 온전히 우리 것으로 만들었다. 당연히 그 과정을 한 자의 거짓 없이 빠트리지 않고 소상하게 기록으로 남겼으니 그게 바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로 이 역시 세상에 다시없는, 한국만이 가진 위대한 기록유산이다.

  십팔기는 중국 척계광의 6기, 일본 검법 3기, 조선 전래의 9기가 합해진 종합병장무예이다. 여기에는 신라 황창랑 고사를 연기로 한 ‘본국검’을 비롯해, 동양 검법의 바이블로 꼽는 ‘조선세법24세’등 누천년 이 땅에 전해져 오며 피와 땀으로 굳힌 우리 무예가 총망라되어 있다. 십팔기는 조선 중기 한반도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국제전의 결과로 정립된 것으로 선조에서부터 정조까지 2백여 년에 걸친 대규모 국방사업이었다. 그러니까 십팔기는 국가가 만든 국가의 무예, 진정한 의미에서 국기(國技)로 세계 유일한 무형문화유산이다.

  예전에 시골에선 집안에 전해져 오던 귀한 고서들을 불쏘시개나 벽지로 뜯어 쓴 일이 많았다. 아무렴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보물을 깔고 앉아 있으면서도 그게 보물인 줄도 모르고 있으니, 흡사 <팔만대장경>판을 땔감이나 빨래판으로 쓰는 꼴이겠다. 그러고도 허구한 날 ‘문화창조’ ‘문화융성’을 부르짖고 있으니 개문견산(開門見山) 시이불견(視而不見)이라 하겠다.

  민족정기는 ‘우리무예 바로세우기’부터

  ‘우리 것이 좋은 것’ ‘우리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하긴 쉽지만 이처럼 땀 흘려 몸에 밴 것은 피식민지배문화임을 알면서도 차마 버리지 못한다. 해방 70년을 맞았지만 조선의 국기는 아직 제 이름조차 찾지 못하고 저자거리를 떠돌며 호신술로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 민족이든 그 민족의 정기(精氣)는 바로 이 ‘무예(武藝)’에 녹아 있다. 정기는 피땀으로 세우는 것이지 입으로 세우는 것 아니다. 당연히 식민무예에는 일본의 정기가 스며있고, 십팔기에는 한민족의 정기가 스며있다. 일본 아베총리의 사과를 받아내고, 집집마다 ‘친일매국인명사전’ 꼽아놓는다고 민족정기가 바로 서는 것 아니다. 일본의 과거사 왜곡을 나무라기 전에 ‘우리무예 바로알기’ ‘우리무예 바로세우기’부터 선행되어야겠다.

   
▲ 십팔기 중 '쌍검'
   
▲ 지난 1월 16일 인류문화유산 남한산성 행궁에서 십팔기 중 ''월도'를 시연하고 있는 (사)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 회원들.
   
▲ 남한산성 수어장대 앞에서 선 (사)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 회원들.
   
▲ 경복궁 '첩종' 행사에서 조선 초기의 무예를 시연하고 있는 (사)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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