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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고구려 ‘선배’와 신라 ‘화랑’
이형모 발행인  |  hansangne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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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1.10  08:4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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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원화와 화랑

   
▲ 이형모 발행인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약소국이었던 신라는 ‘화랑’으로 차세대를 육영하여 나라를 일으켰다.

  <삼국사기> 신라 진흥대왕 본기에, “진흥왕 37년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처음에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볼 방법 없음을 걱정하여, 같은 부류들끼리 모여서 놀도록 하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펴본 후에 그 중에서 우수한 자를 들어 쓰려고 하였다. 마침내 예쁜 여자 둘을 골랐는데, 그 이름이 하나는 남모(南毛)라 하였고, 또 하나는 준정(俊貞)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무리 3백 명을 모았는데, 두 여자가 미모를 다투어 서로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 그를 끌고 가서 강물에 던져 죽여 버렸다. 그 일로 준정은 사형을 당하였으며, 그 무리들은 서로 화목하지 못하여 해산하고 말았다.” 이로써 ‘원화’제도는 실패했다.

  “그 후에 다시 얼굴이 예쁘게 생긴 남자를 택하여 곱게 단장시키고 그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이를 받들었다. 그러자 따르는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혹은 도의로서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기며, 산수를 찾아다니며 놀고 즐겼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이 올바른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되어, 그 중에서 선량한 자를 골라서 조정에 추천하였다.” 

  김대문(金大問)이 쓴 <화랑세기>에는, “현명한 재상(賢相)과 충성스런 신하(忠臣)들이 이로부터 그 두각을 나타냈고, 우수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들이 이로부터 나왔다.”고 하였다.


   고구려의 선배와 조의

  국선(國仙)과 화랑(花郞)은 진흥대왕이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모방해 온 것이다. ‘선배’를 이두문자로 ‘선인(先人)’ 혹은 ‘선인(仙人)’이라고 썼다.

  고구려에서는 ‘신수두’ 단전(檀前)에서의 경기대회에서 ‘선배’를 뽑아서 학문에 힘쓰게 하고, 수박(手博), 격검(擊劍), 사예(射藝), 기마(騎馬), 턱견이(택견), 깨금질, 씨름 등 각종 기예를 익히게 하고, 멀고 가까운 산을 찾아 탐험을 하고, 시가와 음악을 익히고, 공동으로 한 곳에서 숙식을 같이 했다. 평소에는 환난의 구제, 성곽이나 도로 등의 수축을 자임하고, 난시에는 전장에 나아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 공익을 위하여 한 몸을 희생하는 것이 ‘선배’들이었다.

  화랑도 이와 같은데, 이들을 국선이라 한 것은 고구려의 선인과 구별하기 위하여 앞에 국(國) 자를 더 넣어 지은 이름이다. 고구려의 ‘선배’가 검은 천의 옷(皂帛)을 입었으므로 ‘조의(皂衣)’라 불렀듯이, 신라의 ‘선배’는 꽃으로 장식하였으므로 ‘화랑’이라 불렀다. 고구려의 ‘조의와 선배’의 유래 또한 단군조선의 ‘천지화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화랑의 역사 말살한 김부식

  그런데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오류가 많다. 화랑 ‘사다함’이 가라 정벌에 참여한 것은 진흥대왕 23년이므로, 진흥대왕 37년에 화랑이 처음으로 시작하였다는 기록은 명백한 오류이다. 대개 김부식은 유교의 영수로서 화랑파인 윤언이(윤관의 아들)를 쫒아내고 화랑의 역사를 말살한 자였으니, 그의 심보대로 한다면 <삼국사기>중에 화랑이란 명사를 한 글자도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는 중국을 숭배하는 자인지라, 중국의 <대중유사> <신라국기>와 같은 글 속에 화랑이란 말이 게재되어 있으므로, <삼국사기>에서도 ‘화랑’을 빼어버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선랑고사>, <화랑세기> 등은 곧 신라 이래의 ‘선배’들에 관한 기록이니, <삼국사기> 열전에 간혹 그것을 초록해 놓은 것도 있으나, 이는 모두 방어전쟁에서 공을 세운 화랑의 졸도들에 관한 것뿐이고, 3백여 명의 화랑(花郞), 곧 ‘낭도(郎徒)무리들의 스승’에 관하여는 하나도 적어 놓지 않았는데, 여기에도 김부식이 화랑의 역사를 말살하려고 했던 심리가 표현되고 있다.

   화랑과 문화예술

  대개 화랑의 도는 다른 학문과 기술에도 힘을 썼지만 가장 힘을 기울인 것은 음악과 시가(詩歌)로서, 이를 통하여 인간 세계를 교화하려고 하였다. <삼국사기> 악지(樂志)에 보인 진흥대왕이 지은 도령가(徒領歌)와 설원랑이 지은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은 물론 화랑과 관련된 작품이며, <삼국유사>에 “신라 사람들이 향가를 숭상한지 오래되었다... 이 때문에 때로는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일이 한번만이 아니다.”라고 한 ‘향가’ 또한 거의 화랑의 무리가 쓴 것이다.

  최치원의 ‘향악잡영(鄕樂雜詠)’을 보면 이 시가와 음악으로 연극도 많이 하였는데, 부여 사람이나 삼한(三韓) 사람들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여 밤낮으로 가무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삼국지> 등에도 분명히 기재되어 있는 사실이다.

  신라가 그런 습속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이끌 방법을 세워 시가, 음악, 연극, 등을 행하여 인심을 고무함으로써, 그때까지 소국이었던 나라가 마침내 문화, 정치적으로 고구려 및 백제와 대항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

 2015년 11월8일
 재외동포신문 이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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